경제/경제일반_전망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체제 전환: 전통에서 자본주의의 혼합 경제 체제로 - 3

africa club 2001. 10. 22. 17:27
1949년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흑백간에 접촉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많은 법령들이 통과되었다. 1949년에는 다른 인종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타 인종간의 결혼 금지법(Prohibition of Mixed Marriages Act)'이 통과되었고, 1953년에는 공공장소에서 흑백의 신체접촉을 불허하는 '교환금지법(Seperate Amenities Act)'이 통과되었다. 1957년에는 '(Immorality Amendment Act)'가 제정되어 흑백간의 성 관계를 형사 처리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1970년 기준으로 총 인구의 70.2%에 해당했던 흑인이 소유했던 토지는 13%에 불과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7.5%에 불과했던 백인이 전체 토지의 83%를 소유했던 것에 비하면 크나큰 불균형이 아닐 수 없다. 1970년 기준으로 흑인의 연평균소득은 일인당 148$에 불과한 반면 백인은 10배가 훨씬 넘는 2,100$을 기록했다. 흑백노동자간의 월 평균 임금에도 큰 차이가 있어 흑인 노동자가 27$을 받는 반면 백인 노동자는 467$을 받았다. 학생의 경우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학생 보조금도 흑인학생의 경우 20$에 불과했지만 백인 학생은 217$이었다. 이밖에도 가로등, 상하수도 등 주거지역에 제공되는 기반시설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더욱이 일견 흑인의 전통과 문화적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한' 배려로서의 제안된 '분할'정책은 그 결과로 드러난 아프리카 흑인 문화의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파괴 앞에서 그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통계 수치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국민당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흑인 보호 구역에서 백인 구역으로 이동하는 흑인 노동 인구를 철저하게 규제하면서(남자 노동자만이 계약 노동자로 자치 구역을 떠나 백인 지역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흑인 자치 구역의 전통적인 가족 구조와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주의 - 토착인들이 발가벗고 있음'. 이 문구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시절, 더반(Durban) 검역소에 붙어 있던 경고문이었다. 더반 검역소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때 흑인 인구의 도심지 유입을 통제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도시에 이주해 들어 올 자격을 갖춘 흑인들은 모두 이곳에서 발가벗겨진 채 철저한 위생 검사와 함께 방역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흑인들은 도심지역에 위험한 질병을 유포할 위험성이 있는 존재라는 일반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이처럼 부정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 흑인은 백인으로부터 제도적으로 격리되어야 했다. 중세 유럽의 광인들이 사회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감옥이라는 제도에 감금되어야 했던 것처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흑인들은 백인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2) 가족의 붕괴
  (1) 남녀 성비(性比)의 불균형.
  (2) 가치관의 변화 ... 화폐 도입으로 인한 서구식 사유재산권의 발생.
  (3) 전통 경제 활동의 경시 ... 남성 우월주의의 강화.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남아공의 경제 구조는 사회-문화적인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1) 경제권의 양분화: 도시 vs 농촌
   노동 인구의 일방적인 흐름과 제한. 사회 복지-개발 정책의 불균형.  

2)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임(賃) 노동자의 집단 이주
   (1) 포르투갈 령 모잠비크에서 남아프리카로 계절 노동자 집단 이주
   (2) 노동자의 수입 ...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철도 건설, 사탕 수수밭 노동자 수입 -- 흑인 노동자들과의 갈등을 일으킴.

3)여성 경제활동의 위기
  (1) 전통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지역 시장 경제에 적극 참여. 하지만 경제 단위가 커가면서 여성들의 경제 활동 참여권은 점차 축소. 특히 국제 경제 활동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아주 미미.
  (2) 여성들의 도시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했음. 식민 정권이 정책적으로 '남성 = 임노동자', '여성 = 농민'의 개념을 형성. 이러한 현상은 특히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결과로 나타남. 아파라트헤이트 정권은 도시지역에 흑인 인구가 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골에 있는 가족이 임 노동자와 결합하는 것을 금지시킴.
  (3) 가족 제도의 변화: 여가장의 대두

남성들의 장기간 부재는 집안에서 차지하는 여성들의 부담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여성이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1. 철저한 독점 자본주의
1) 광산, 화폐 농산물 독점(1차 산업) ... 이주 노동자와 계절노동자를 형성. 아프리카 전통 사회의 광범위한 파괴. 노동조합이 가장 활성화된 분야.
2) 제조업(특히 군수업) 독점(2차 산업)  
3) 금융 독점 자본(3차 산업)
2. 정부 간섭(통제)
남아공 경제에서 정부 간섭이 실시된 시점은 1924년 연합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였다고 본다. 연합 정부는 백인 노동자의 이해와 백인 시골 자본과의 연합을 기초로 한 정부였는데 이 정부는 국가 중심의 경제 구조로 재편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특히 농업과 제조업에 간여하는 정부의 통제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였다.
정부가 산업 구조와 경제 활동에 간섭하는 주된 이유는 정부의 정치적인 목적과도 일치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부는 산업 구조와 경제 활동 중 특히 노동자의 이주를 통제하는 부분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았는데 이를 위해 '집단 거주법'(group area act)과 흑인의 도시 거주법'(Black urban areas act) 등을 제정했다.


경제 공황
1) 1860년대 초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하면서 선식업을 통해 많은 이득을 올려 오던 케이프 식민지의 경기가 적지 않은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2) 케이프 식민지의 유일한 주 수출 품목이었던 양털 가격이 미국 내전이 끝난 186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국제 시장에서 급격히 하락하게 된다.
3) 심각한 가뭄이 농산물에 절대 의존하고 있던 남아공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대규모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도입한 남아공의 광산업은 초기부터 흑인 임노동자와 흑인 인구에 대한 정부차원의 차별/억압 정책은 인종 차별을 모토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광산 자본(자본주)와 백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흑인 차별이라는 범주 안에서 자행되었다.  

다섯 차례의 경제 위기
1) 1920-22: 흑인 노동자들의 시위와 세계 경제 공황
2) 1928-32: 세계 경제 대공황
3) 1952-53: 정부의 지나친 인플레이션 간섭
4) in the early 1960s: 정치적인 문제, 흑인 사회의 소요
5) in 1979: 세계 경제 공황, 흑인 사회의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