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에서의 노동 운동은 산업분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의해서 194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20년대에는 세탁, 제빵, 의류 그리고 시청 노동자들에 의해 소규모 노동조합이 결성(1만-1만 5천)되었지만 1929년 이후 이 노동단체들은 경제공황과 정치적 탄압을 받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1935-6년 사회주의 과격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이 외부로부터 유입돼 남아공 인종관계 위원회(South African Institute for Race Relation)의 정신적 지원을 받아 조직되었다.
1937년에 The Joint Committee of African Trade Union은 7개의 노조에 15700 명의 노조원을 거느린 조직으로 발전했다.
1940년에 21개의 하위노조에 2만 5천명의 회원을 거느린 노동단체로 발전했는데 이는 당시 아프리카 노동자의 30%를 대변하는 중심적인 노동단체였다.
노동 운동은 2차 세계 대전의 종식과 함께 남아공 공산당이 설립되면서 동맹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그 세력도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노동조합은 The Council of Non-European Trade Union; CNETU)로 명칭을 바꾸고 1945년에는 119개 노동 단체에 158000명의 노동 조합원을 거느린 규모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활발한 노동운동을 전개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를 하는 활발한 노동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42년부터 44년까지는 버스 요금 인상에 반대를 해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전개했고 1944년과 46년에는 스쿼터 캠프(Squatter Camp)를 전개하면서 "sofasonke"(우리는 함께 죽을 것이다)라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도 지속적이고 폭력적으로 대응해 1946년에 6-7만명에 달하는 노조원을 갖은 광산노조가 정부의 탄압을 받고 와해되었다. 같은 해에 6천명의 노조원을 갖고 있는 철강노조도 같은 탄압을 받고 조직이 와해되었다. 급기야 1947년에는 CNETU가 분열되었다.
이렇게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오던 노조운동은 1985년에 이르러 그간의 역량을 총 집합해 코사투(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이 설립되면서 남아공에서의 노동운동에 본격적인 불씨를 지폈고 코사투는 ANC와 남아공 공산당과 동맹을 맺고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붕괴시키는 주요 투쟁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남아공노동조합 회의(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 ;COSATU)
1985년 12월에 당시 남아공에 있던 개별 노조들을 규합하여 반 인종차별, 반 성차벌 그리고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결성됐다. 현재 33개 회원 노조에 180만 명의 노조원을 두고 있는 남아공 최대의 노동조합이다.
현재 코사투를 중심으로 지난 6년간 남아공 노동조합에서 직접 투자해 20여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현재 남아공이 안고 있는 경제 구조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흑인 노동자의 손에 벗어나 있던 경제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예를 들어, JSE에 상장된 회사중 단 1.5% 만이 흑인이 소유한 회사인데 이것은 백인 중심의 경제활동이 구조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노조에서 투자한 20여 개의 회사 중 특히 광산노동자, 의류노동자, 그리고 공공노동자들이 투자한 회사들이 활기를 띄고 있는데, 회사의 이익금은
1) 해고된 노동자들의 재활훈련;
2) 노동자들에 대한 의료 서비스 확충;
3) 자녀에 대한 교육 여건 개선;
4) 지도자 훈련을 해서 주주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교육
등에 재투자를 한다는 것이 회사 설립의 기본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의류노동조합은 파산상태에 있던 회사 3개를 매입하여 노동자들을 해고의 위험으로부터 구출했다.
94년 흑인 정권이 들어선 후 남아공에서는 그 동안의 인종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affirmative action 이라는 정책을 도입했다. 이중 평등고용권은 인종과 성별, 장애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회사의 고용인 중 일정 비율을 이들로 충원하도록 지시한 법이다. 하지만 150인 이상을 고용한 회사 중 3000여 개만이 이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고 전체의 40%에 해당하는 722개 회사는 이 정책을 실시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상위층 관리자 중 유색인종이 차지하는 비육은 단 28%이다.
남아공의 노동 시간을 살펴보더라도 인종간에 차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남아공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을 갖고 있는 층은 흑인 남성으로 48.1시간이다. 백인 남성은 46시간, 혼혈 남성이 45시간 인도 남성이 44.9시간을 노동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여성은 44.3시간, 혼혈 여성은 41.7시간, 그 뒤를 인도 여성 42.1시간 그리고 백인 여성은 41시간 순 이다.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은 거의 하루 노동시간에 가까운 7.1시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하게 임금을 받는 노동 시간을 계산에 고려한 것일 뿐 노동 임금을 가지고 생활을 할 수 없는 대다수의 흑인들의 경우에 과외 노동 시간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남아공 노동 단체의 가장 큰 이슈중의 하나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노동조합의 주장에 따르면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고용 인력이 늘어날 것이며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고용창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 시간을 단축했던 한 화학공장의 경우 전체적으로 3.3%의 노동 고용 창출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노동 시간을 단축할 경우 회사들은 영구직을 줄이고 임시 계약직 노동자를 고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화학 공장의 경우 전체적으로 3.3%의 인력이 더 고용되었지만 오히려 영구직은 4.2% 감소했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1992년 현재 남아공의 임금 또한 인종간에 엄청난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높은 임금은 역시 백인으로 월평균 1572랜드 (약 30만원), 아시아인 523랜드 (약 10만원), 혼혈인 325랜드 (약 6-7만원) 그리고 흑인은 165랜드 (약 3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더반에 있는 한 한국인 회사에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숙련공인 경우 주 150랜드를 받고 있으니 한 달에 약 6-7백 랜드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것도 월급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경우라고 하니 그 외의 경우에는 어떠할 지 뻔한 것이다. 특히 사탕수수밭이나 여타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월급 수준은 경악을 할 정도이다. 이들 단순 노동자들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하면서 월 60랜드 수준의 월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말이다. 그나마 영구직은 없고 계약직 노당자들이다. 이렇게 남아공의 경제 구조는 비백인, 특히, 흑인,들의 '저임금, 중노동'이라는 가혹한 경제 활동을 기반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아래에서의 노동정책은 흑인과 흑인 사회를
1) 전통적인 사회체제의 유지;
2) 산업사회에 노동력 제공
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흑인들에게 주변적 위치에 머물도록 물리적 정신적 강요를 해왔다. 노동자로 나선 흑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로 인해 흑인 사회는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1) 부부관계의 비정상화
2) 위험한 사회화
3) 높은 사생아 비율
남편/아버지의 부재는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남편/아버지의 부재는 부부관계의 안전성을 뒤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94년 흑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아공에서는 그 동안의 인종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affirmative action이라는 정책을 도입해 실시하고 있다.
현재 남아공 정부는 ANC, 남아공 공산당, 그리고 코사투의 삼자 연맹 형식의 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다.
1935-6년 사회주의 과격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이 외부로부터 유입돼 남아공 인종관계 위원회(South African Institute for Race Relation)의 정신적 지원을 받아 조직되었다.
1937년에 The Joint Committee of African Trade Union은 7개의 노조에 15700 명의 노조원을 거느린 조직으로 발전했다.
1940년에 21개의 하위노조에 2만 5천명의 회원을 거느린 노동단체로 발전했는데 이는 당시 아프리카 노동자의 30%를 대변하는 중심적인 노동단체였다.
노동 운동은 2차 세계 대전의 종식과 함께 남아공 공산당이 설립되면서 동맹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그 세력도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노동조합은 The Council of Non-European Trade Union; CNETU)로 명칭을 바꾸고 1945년에는 119개 노동 단체에 158000명의 노동 조합원을 거느린 규모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는 활발한 노동운동을 전개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를 하는 활발한 노동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42년부터 44년까지는 버스 요금 인상에 반대를 해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전개했고 1944년과 46년에는 스쿼터 캠프(Squatter Camp)를 전개하면서 "sofasonke"(우리는 함께 죽을 것이다)라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도 지속적이고 폭력적으로 대응해 1946년에 6-7만명에 달하는 노조원을 갖은 광산노조가 정부의 탄압을 받고 와해되었다. 같은 해에 6천명의 노조원을 갖고 있는 철강노조도 같은 탄압을 받고 조직이 와해되었다. 급기야 1947년에는 CNETU가 분열되었다.
이렇게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오던 노조운동은 1985년에 이르러 그간의 역량을 총 집합해 코사투(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이 설립되면서 남아공에서의 노동운동에 본격적인 불씨를 지폈고 코사투는 ANC와 남아공 공산당과 동맹을 맺고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붕괴시키는 주요 투쟁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남아공노동조합 회의(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 ;COSATU)
1985년 12월에 당시 남아공에 있던 개별 노조들을 규합하여 반 인종차별, 반 성차벌 그리고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결성됐다. 현재 33개 회원 노조에 180만 명의 노조원을 두고 있는 남아공 최대의 노동조합이다.
현재 코사투를 중심으로 지난 6년간 남아공 노동조합에서 직접 투자해 20여 개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현재 남아공이 안고 있는 경제 구조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흑인 노동자의 손에 벗어나 있던 경제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예를 들어, JSE에 상장된 회사중 단 1.5% 만이 흑인이 소유한 회사인데 이것은 백인 중심의 경제활동이 구조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노조에서 투자한 20여 개의 회사 중 특히 광산노동자, 의류노동자, 그리고 공공노동자들이 투자한 회사들이 활기를 띄고 있는데, 회사의 이익금은
1) 해고된 노동자들의 재활훈련;
2) 노동자들에 대한 의료 서비스 확충;
3) 자녀에 대한 교육 여건 개선;
4) 지도자 훈련을 해서 주주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교육
등에 재투자를 한다는 것이 회사 설립의 기본 방침이었다. 이를 위해, 의류노동조합은 파산상태에 있던 회사 3개를 매입하여 노동자들을 해고의 위험으로부터 구출했다.
94년 흑인 정권이 들어선 후 남아공에서는 그 동안의 인종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affirmative action 이라는 정책을 도입했다. 이중 평등고용권은 인종과 성별, 장애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회사의 고용인 중 일정 비율을 이들로 충원하도록 지시한 법이다. 하지만 150인 이상을 고용한 회사 중 3000여 개만이 이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고 전체의 40%에 해당하는 722개 회사는 이 정책을 실시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상위층 관리자 중 유색인종이 차지하는 비육은 단 28%이다.
남아공의 노동 시간을 살펴보더라도 인종간에 차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남아공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을 갖고 있는 층은 흑인 남성으로 48.1시간이다. 백인 남성은 46시간, 혼혈 남성이 45시간 인도 남성이 44.9시간을 노동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여성은 44.3시간, 혼혈 여성은 41.7시간, 그 뒤를 인도 여성 42.1시간 그리고 백인 여성은 41시간 순 이다.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은 거의 하루 노동시간에 가까운 7.1시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하게 임금을 받는 노동 시간을 계산에 고려한 것일 뿐 노동 임금을 가지고 생활을 할 수 없는 대다수의 흑인들의 경우에 과외 노동 시간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남아공 노동 단체의 가장 큰 이슈중의 하나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노동조합의 주장에 따르면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고용 인력이 늘어날 것이며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고용창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 시간을 단축했던 한 화학공장의 경우 전체적으로 3.3%의 노동 고용 창출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노동 시간을 단축할 경우 회사들은 영구직을 줄이고 임시 계약직 노동자를 고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화학 공장의 경우 전체적으로 3.3%의 인력이 더 고용되었지만 오히려 영구직은 4.2% 감소했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1992년 현재 남아공의 임금 또한 인종간에 엄청난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높은 임금은 역시 백인으로 월평균 1572랜드 (약 30만원), 아시아인 523랜드 (약 10만원), 혼혈인 325랜드 (약 6-7만원) 그리고 흑인은 165랜드 (약 3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더반에 있는 한 한국인 회사에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숙련공인 경우 주 150랜드를 받고 있으니 한 달에 약 6-7백 랜드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것도 월급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경우라고 하니 그 외의 경우에는 어떠할 지 뻔한 것이다. 특히 사탕수수밭이나 여타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월급 수준은 경악을 할 정도이다. 이들 단순 노동자들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하면서 월 60랜드 수준의 월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말이다. 그나마 영구직은 없고 계약직 노당자들이다. 이렇게 남아공의 경제 구조는 비백인, 특히, 흑인,들의 '저임금, 중노동'이라는 가혹한 경제 활동을 기반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아래에서의 노동정책은 흑인과 흑인 사회를
1) 전통적인 사회체제의 유지;
2) 산업사회에 노동력 제공
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흑인들에게 주변적 위치에 머물도록 물리적 정신적 강요를 해왔다. 노동자로 나선 흑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로 인해 흑인 사회는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1) 부부관계의 비정상화
2) 위험한 사회화
3) 높은 사생아 비율
남편/아버지의 부재는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남편/아버지의 부재는 부부관계의 안전성을 뒤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94년 흑인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아공에서는 그 동안의 인종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affirmative action이라는 정책을 도입해 실시하고 있다.
현재 남아공 정부는 ANC, 남아공 공산당, 그리고 코사투의 삼자 연맹 형식의 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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