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아프리카의 민족과 문화

소말리 (Somali) 족

africa club 2001. 12. 11. 21:44
소말리아 민주 공화국 또는 소말리아는 현대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보기 힘든 단일 민족을 형성하고 있다.  소말리아인은 약 7백만명으로 집계되고 이들 중 2백만명은 소말리아 공화국 밖에서 산다. 이들은 주로 케냐, 이디오피아 그리고 지부티 등 인근 국가들의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또한 동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중요 도시에는 소말리아 공동체가 있고, 작은 소모임이 세계의 항구와 수도에 흩어져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슷한 문화와 언어, 같은 종교(이슬람) 그리고 같은 공동체 의식을 공유한다.
소말리아인들은 그들의 투사로서의 잔인성, 불굴의 독립, 개인주의(아름답지만 힘들고 냉정한 환경에서 형성된 특징)로 항상 알려져 왔다.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알려진 아프리카 동북부의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소말리아 사람들은 인종적으로 한때 검은 색의 피부이지만 얼굴의 외형은 니그로형 보다는 아랍인이나 유럽인들과 비슷한 햄족이라고 불리던 중간형 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분명히 그들의 현재 영토 북부지역에서, 아덴(Aden)해협 만 가까운 곳에서 분리된 사람들에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자연조건적으로는 살기에 힘들고 건조한 지역에서 강수량은 아주 적었으며 소말리아는 해안을 마주한 북쪽에 있는 산의 급경사지 절벽과 함께 건조한 사바나 초원과 반사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서지역의 고지대에서 농작물이 자라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유일한 생계수단은 가축방목에 의한 것이다. 이들은 물과 풀을 찾기 위해 그들의 가축을 몰고 끊임없이 옮겨 다니는 유목민들이다. 비가 오지 않는 계절은 가장 힘든 시기이며 결과는 기근으로 나타난다.  사헬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주기적으로 가뭄이 발생하는데 1974년에 발생한 한발로 인해 약 7천명의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한 소말리아 시인이 지은 시를 살펴보면 가뭄이 얼마나 심각한 가를 알 수 있다.
덤불의 무성함과 헤치고 들어갈 수 없는,
말라버린 나무들,
그것들로부터 생성되는 뜨거운 공기,
불길처럼 너를 스칠 것 같은 더운 바람과 열기...
따끔거리는,
가시있는 가시덤불과
가시에 의해 따끔거리는
발의 부어오름
새까맣게 탄 식물과 탄 나무의 뜨거운 그루터기,
그것들로부터 생성되는 뜨거운 공기...

유목민들에게 물과 비는 삶에 있어 달콤한 모든 것을 뜻한다. 이 사랑의 노래를 쓴 작가는 그의 연인의 아름다움을 비가 내린 곳에서 싹트는 신선한 초원이나 혹은, 가뭄에도 건강함과 초록색을 유지할 틈새 사이에서 자라나는 나무와 비교한다.
서기 9세기와 10세기동안, 소말리아인들은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아마 그들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계였다. 이후 이슬람은 그들 문화의 기초가 되었고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의 표시였다.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바다건너 그들에게 매우 가까운 아랍 세계의 영향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오늘날 소말리아 공화국은 아랍어권 중에서 아랍어를 쓰지 않는 유일한 나라이다.
일찍부터 아랍 무역인들은 ‘아프리카 뿔’ 지역을 따라 형성된 항구를 이용하였다.  그들의 인구와 특별한 문화는 소말리아 국가로 합병되지는 않았다. 모가디슈(Mogadishu)와 같은 항구는 이제는 소말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아라비아의 문명으로부터 받은 혜택은 아라비아로부터 온 소말리아인들 조상과 모하메드라고 자처하는 예언자인 친척들의 전통 속에 간직된다.
소말리아인들의 인구증가는 그들의 설화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 그들은 주바(Juba)와 셔벨(Shebelle)강이 이디오피아 고지대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소말리아인들은 매우 다른 거주지와 환경을 찾아 북쪽으로부터 이 곳으로 옮겼다. 그 강들을 따라 형성된 땅과 그 사이의 초원은 비옥하고 농업에 잘 맞는다.  실제로 남쪽에서 온 반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미 경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과의 협정 또는 정복과 함께 많은 소말리아인 무리들은 땅을 경작하거나 노예나 고용인의 신분으로 그 땅들을 경작함으로써 그 지역에 계속적인 정착을 하였다. 남부 소말리아는 북쪽에 비해 좀 더 평화롭고 개방적이고 쉽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을과 도시에 영구적으로 함께 산 것과 같이 평화로운 기구가 형성된 쉬운 환경에 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반투족 사람들을 동화시켰다. 그들의 관습과 전통은 많은 점에서 달랐고 남부 방언의 일부는 북쪽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아듣기 힘들었다. 북쪽 유목민들은 전통적으로 남부 유목민들을 소말리아에 걸맞지 않게 부드럽고 머리가 둔한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남부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북부인들은 투박하고 무질서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강을 중심으로 소말리아인들이 정착되어가는 동안, 다른 소말리아 무리들은 그 지역을 우회하여 좀더 남쪽인 케냐의 북부 지역이가 시작되는 타나(Tana)강에 이르는 아주 먼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의 상태는 북부 소말리아와 비슷하고 그들은 유목민의 방식을 유지했다.
소말리아 사회 구조는 삶의 이러한 방식에 기초를 둔다. 유목민의 평범한 삶의 무리는 그들의 부인과 아이들, 그리고 어쩌면 남편을 여읜 어머니 혹은 다른 의존자들과 함께 한 명의 남자 또는 두세 명의 친척 남자로 구성된다.  결혼한 여자들은 그들의 캠프를 옮겨야 할 때면 낙타의 등에 꾸릴 수 있고 철거가 가능한 가지로 된 골격에 접을 수 있는 구조의 매트를 까는 집을 갖는다. 야영지는 밤에 천적과 포식자들이 못 들어오게 하고 양과 염소는 못 나가게 하기 위해 가시나무 가지로 쌓아올린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양과 염소 등 가축들은 이들 유목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가축들을 돌보는 일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몫이다. 그러나 유목민의 자존심은 우유와 고기를 제공하는 한 신망과 아름다움의 대상인 낙타이다. 그들이 물 없이 장기간 가야할 때, 그들은 웅덩이나 샘 속에 머물러야 하는 가축을 따로 모은다. 많은 낙타들은 7살 이상의 소년들에 의해 그들이 20대가 되거나 결혼할 만큼 나이가 들기 전까지 가축들을 돌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므로, "이웃"같은 것은 없다. 유일한 유대는 한 인간의 친척이다. 그를 돕는 친척이 없으면 그는 도움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최근까지 이 유대는 매우 강했고 매우 순수했다. 어느 시인은 "친척은 야영지를 보호하는 가시 담장과 같아야 한다" 라고 말한다. 한 무리로부터의 같은 사람의 자손들과 이러한 무리들은 소말리아의 전통적인 사회였다. 친척의 무리가 부족한 물과 목초를 위해 싸우고 경쟁했다. 현대 사회까지 소말리아 내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없었다. 결정은 성인들 사이의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소말리아 여자들은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의 여자들과는 다르게 베일로 가리거나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엄격한 단정의 규범을 따라야했다. 전통적으로 처녀성은 외과적인 음문의 접합인 인피불라이온(infibulayion)에 의해 보호 받았다. 그것이 매우 아플 뿐만 아니라 그 소녀의 신혼 밤이 즐거운 경험이 되지 않게 하도록 보증하기 위해 수술은 8세 부터 11세 까지 받았다. 이것은 대부분의 교육받은 현대 소말리아인들이 거부하고 바뀌기를 바라지만 여전히 우세하고 이것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나이든 여자들인 국가적 전통의 하나이다.
소말리아 족의 생활은 그들의 엄청난 시의 전통에 투영되어있다. 소말리아어는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서 시는 구전으로 순환되고 최고라고 판단된 것은 조심스럽게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알려진다. 고전적인 시는 매우 복잡하고 예술을 필요로 한다. 시들은 종종 정치적 주제, 논쟁과 선전에 대해 시인 고유의 경험을 언급한다. 그들의 시중 가장 유명한 것은 종교전쟁 지도자인, 영국인들과 이탈리아인들, 이디오피아 침략자들에게 대항하는 20년동안 이어진 무장운동에 참여한 20세기의 시작에 있던 모하메드 하산(Mohammed Hassan : 영국인들에 의해 "미친 학자"라는 별명이 붙여졌음)이었다.
현대의 가장 인기 있는 옛날 시형의 기술보다 간단한 형식을 쓰는 노래에서 사랑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이다.  많은 시들은 전통 소말리아 문화의 성적인 제지라는 배경에 대항하여 최상의 감상이 될 만한 낭만적인 강도를 갖는다.
소말리아 사회는 급속히 변하고 있다. 1974년의 사헬지역의 비참한 가뭄 이후에 유목민들은 농부나 어부로 정착했다. 1970년대 "과학적 사회주의"로 소집된 정부아래 소말리아 공화국은 그들의 오래된 자부심을 어떻게 변모시켜야 하고, 소말리아 모든 동포애를 위해 형식상으로 그들을 분리한 친족과 혈통에 대한 왕권을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정신으로 어떻게 독립해야 하는지 배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