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와힐리(Swahili)는 동아프리카 대부분 널리 퍼져있는 언어 뿐만 아니라 케냐(Kenya)와 탄지니아(Tanzania)의 해안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에게 또한 주어진 이름이다. 스와힐리라는 단어는 해안거주자를 뜻하는 사헬(Sahel)이라는 아라비아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들은 공통된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인구를 형성하였으나 스와힐리와 그들 주변과의 경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못하였다. 이 지역의 복잡한 사회에서 더 높은 지위를 주장하며 누가 진정한 스와힐리인가와 누가 인접국의 사람인가라는 것을 따지는 논쟁은 항상 있어왔다. 동아프리카는 생태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독특하다. 그것은 비옥한 토양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많은 작은 섬들과 함께, 인도양과 내륙의 고지 쪽으로 뻗어있는 불모의 평원 사이에 있는 매우 좁은 땅이다. 이 해안의 길고 좁은 토지는 내륙과 바다를 가르는 땅 사이의 연결에 있는 내륙과 바다 모두의 성질에도 완전히 속해있지 않은 중간지역인 배후지구와는 상당히 다르다. 스와힐리는 내륙의 사람들과 인도양해안으로부터의 사람들 특히 아랍인들 사이의 유대 속에서 한 세기를 살아오고 있다. 스와힐리는 별개의 인종부족의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하고, 혼합된 해안 사회에서 고유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일부는 그들의 최근의 조상 중에 있었던 무시무시한 부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과거에 해안을 차지하였던 원주민과 이주자들과 혼혈되어 스와힐리를 형성하였던 사람들의 신원 또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8세기 이후 아랍인이 포함된 사람 중의 다양한 계급이 있었다. 그들은 작은 전통적인 거주지를 형성하면서 해안을 따라 서서히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스와힐리는 12세기에 가장 늦게 그들만의 유일한 삶의 방식을 가진 독특한 사람들로서 나타났다. 그 해안을 따라있던 돌로 지어진 마을은 작은 도시의 주된 수도였다. 소규모의 군대를 가지고 있는 스와힐리 왕국의 왕은 돌로 된 사원을 남겨놓았다. 그 마을은 대부분 식물로 무성해진 폐허로써 산호절벽과 바다의 작은 섬 위에 아직도 존재한다. 파테(Pate)와 킬와(Kilwa)는 아마도 15세기에 해안을 따라있는 가장 중요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킬와는모노모타파(Monomotapa) 금 무역의 중앙시장이었다. 본토와 떨어진 섬에 잔지바(Zanziba)와 펨바(Pemba)의 주와 마을이 있었다. 이들 주는 계속되는 싸움 속에 있었고 15세기 이후 그들의 쇠퇴는 대부분 18세기에 오만 아랍인들에 의해 차례로 추방당한 포르투갈(Portuguese)이주민의 도착 때문이었다. 아랍 술탄들은 잔지바(Zanziba)에 지배의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고 19세기동안에 그것은 대호수(Great Lake)까지 이르는 동아프리카 본토 전체를 효과적으로 지배하였다. 잔지바는 노예무역의 폐지와 영국과 독일식민지 지배의 출현으로 결국에는 쇠퇴하였다. 언어와 종교는 스와힐리의 방언이 많이 있지만 소수의 세부 어휘만을 제거하면 모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반투(Bantu)어와는 다르게 그것은 오랫동안 아랍체의 활자로 쓰여져 왔고, 시와 운문체는 퇴고하는 전통이 있다. 그들의 이슬람교의 믿음은 스와힐리를 이슬람적인 세계로 이어지게 하였고, 또한 그들을 오지의 사람들로부터 구별 지었다. 이슬람사원은 작지만 정착지의 중심이다; 더 큰 스와힐리 마을은 종종 각각 작은 이웃의 중심인 수십개의 사원을 가지고 있다. 스와힐리는 본질적으로 도시 거주자이다. 그들의 돌로 된 마을의 집과 작은 진흙과 야자나무로 지붕을 만든 집에 둘러싸인 사원과 함께 스와힐리 마을의 저택과 도로는 스와힐리가 아닌 이웃들의 것과 매우 다르다. 오늘날 2층 계단의 돌집은 종종 버려지거나 유기되지만 고도의 스와힐리 문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들은 스와힐리 삶의 방식의 중심으로 대표된다. 납공업과 돌욕실, 돌조각, 정교한 석고작업과 미세하게 조각된 문은 공들인 의자와 침대, 용기, 그리고 다른 기구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지위의 표시였다. 전통적인 스와힐리 생산품은 금과 은의 보석류, 짠 실크와 면직물, 가죽제품 그리고 미세한 철제품을 포함하고 있다: 돈이 많은 부잣집은 중국과 인도의 자기를 수입한다. 이것들의 모든 것은 상당한 부를 요구 한다: 노예와 상아는 그것을 제공한다.
스와힐리는 잔지바르의 아랍인들과 함께 노예와 상아를 위해 아프리카의 내륙으로 갔다. 이것들은 개오지 조개, 고무, 금, 목재와 농업생산물들과 함께 인도양의 나라들에 수출되었다. 스와힐리는 그들만의 소비를 위해서 코코넛제품, 과일과 마찬가지로 수수와 얼마간의 쌀을 항상 풍부하게 생산하였다. 고기잡이의 중요성은 해안문화와 일상생활에 침투해 있는 기술에서 명백해진다. 그러나 높은 지위는 항상 토지 소유주와 농장 경영주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소매무역은 단지 아랍인과 인도인들에게만 적합한 것으로 무시당하였다. 비록 여전히 부유하지만 스와힐리 연안과 그곳 사람들은 이전의 자원과 영광을 잃었다. 오늘날 스와힐리는 비록 그들이 이전세력의 재건립을 추구하지는 못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식민지의 지배하에서 누렸던 쇠퇴로부터 빠져나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수세기동안 형성되어온 언어와 문화는 독립된 케냐와 탄자니아에 널리 퍼져 그들에게 높은 문화의 위신과 유일한 신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스와힐리는 잔지바르의 아랍인들과 함께 노예와 상아를 위해 아프리카의 내륙으로 갔다. 이것들은 개오지 조개, 고무, 금, 목재와 농업생산물들과 함께 인도양의 나라들에 수출되었다. 스와힐리는 그들만의 소비를 위해서 코코넛제품, 과일과 마찬가지로 수수와 얼마간의 쌀을 항상 풍부하게 생산하였다. 고기잡이의 중요성은 해안문화와 일상생활에 침투해 있는 기술에서 명백해진다. 그러나 높은 지위는 항상 토지 소유주와 농장 경영주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소매무역은 단지 아랍인과 인도인들에게만 적합한 것으로 무시당하였다. 비록 여전히 부유하지만 스와힐리 연안과 그곳 사람들은 이전의 자원과 영광을 잃었다. 오늘날 스와힐리는 비록 그들이 이전세력의 재건립을 추구하지는 못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식민지의 지배하에서 누렸던 쇠퇴로부터 빠져나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수세기동안 형성되어온 언어와 문화는 독립된 케냐와 탄자니아에 널리 퍼져 그들에게 높은 문화의 위신과 유일한 신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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