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문학/속담

<font color=blue>스와힐리어 속담에 나타난 아프리카인의 문화적 정체성 - 스와힐리어 속담연구 (5)

africa club 2004. 7. 13. 13:08

6.45 말과 침묵(Speech/Silence)


■ Binadamu ana macho mawili, masikio mawili na mdomo mmoja.
   인간은 두 개의 눈과, 두개의 귀와 하나의 입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보는 역할을 하는 눈도 하나가 아니고 두 개로 많이 보라는 의미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귀도 역시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인 까닭은 귀는 본래 그 역할이 남의 말을 듣는데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그러므로 상대방의 의견을 많이 듣고 경청하라는 의미가 될 수 있겠다. 그런데 반대로 입이 하나인 이유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많이 듣고 세상을 많이 보되 많이 말하지 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말은 적을수록 좋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Kinywa ni jumba la maneno.
   입은 단어의 집이다.
■ Debe tupu haliachi kuvema.
   빈 깡통은 소리 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 Mwenye kelele hana neno.
   수다스런 사람은 어떤 소식/전갈도 갖고 있지 않다.
■ Simba aendaye kimya ndiye alaye nyama.
   천천히 움직이는 사자는 고기를 먹는 놈이다.
■ Neno jema lilitoa nyoka pangoni.
   친절한 말은 뱀을 구멍속에서 나오게 한다.
■ Maneno ni kama fumo yakitoka mdomoni hayarudi.
   말은 마치 창과 같아서 입술에서 떠나는 순간 돌아오지 않는다.
■ Heri kukwaa kidole kuliko kukwaa ulimi.
   발부리가 걸려 넘어지는 것이 말을 더듬는 것(실수하는 것)보다 낫다.
■ Huwezi kuwaza, bila kunyamaza.
   혀를 붙들지 않고서는 생각할수 없다.
■ Msi hadhari hujifunga kwa ulimi wake.
   부주의한 사람은 자기 혀로 자신을 속박할 뿐이다.
■ Mtu hachongewa na ulimi wake.
   사람은 자신의 혀에 의해 배반당한다.
■ Natuone ndipo twambe, kusikia si kuona.
   보자, 그런 후에야 우리는 말할 수 있다,듣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 Jicho la jirani halikuangalii bwami.
   듣는 것 보다는 보는 것이 낫다.
■ Kusikia si kufikia.
   소문은 도달한 것이 아니다. 소문은 그 지점에서의 사실과 같지 않고 변한다.
■ Kusikia si kuona.
   들은 것은 본 것이 아니다. 네가 들은 것 모두를 믿지는 말라.



속담은 잉태된 지역의 향토성과 가치관, 생활양식을 반영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말과 관련한 아프리카 속담을 분석해 보았다.

첫째, 각 속담에는 언중의 신념과 인생관, 처세술이 엿보인다. 특히 문자 언어가 없었던 아프리카에서는 이러한 구전 속담을 통해 각 구성원에 대한 사회화 교육을 행해야 했을 터라 다른 문화권보다 속담이 더 발달되었다고 생각된다. 말에 대한 속담에 특수화를 시켜본다면 속담을 통해 각 개인을 보호하고 집단을 유지하는 교육을 구성원에게 시켰음을 알 수 있다.한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어 부족사회에서 이탈한다는 것이 바로 죽음을 뜻하는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여타 다른 공동체 보다 서로간의 신뢰와 융화가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서로를 무시하고 싸움이 잦아지면 집단간의 응집력을 약화시켜 타 집단과의 전쟁에서 불리할 수 밖 에 없어 사회의 존폐 위기에 처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는 마을을 이탈한다는 것이 각 개인에게 초래할 손상을 약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따른 서로에 대한 예의가 잘 발달했을 것이고, 족장이나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에 의해 위에서 언급한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교육이 행해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각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소문만을 듣고 사실을 판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말은 아무래도 전해오면서 왜곡이 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섣불리 개인에 대한 판단(주로 비난)을 하지 말고 진상을 밝혀서 억울하게 소문으로 인해 집단에서 이탈하는 자가 나오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도 자신이 말한 것에 책임을 지도록 하여 행여 있을 말실수에 대해 타인이 입어야 할 피해를 극소화 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집단 유지를 위해서 각 개인이 융화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에 대한 각별한 조심성을 요구했다.
그리고 각 집단 구성원에게 서로가 원활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듣기 좋은 말을 할 것을 권장했다.


6.46 절도(Stealing)


■ Mlia ashitakiwe, meiba fupa mwenyewe.
   누군가가 범인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뼈를 훔친 사람이다.
■ Paka haekewi kitoweo kulinda.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지키게 하지는 않는다.



이 속담은 우리나라 속담의 "도둑이 제 발 저린다." 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속마음으로 그것이 드러날까 걱정이 되어 조마조마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태도에서 그 실정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에 고양이에게 음식을 지키라고 한다면 고양이는 재빨리 그 음식을 훔쳐와서 눈 깜짝할 새에 입안에 넣어버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이 속담은 소중한 물건을 신용 없는 사람에게 맡겨두지 말라는 뜻으로 쓰여진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양이에게 생선맡기기."라는 속담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으로 미루어 고양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신용을 얻지 못하는 동물인가보다^^.

  
6.47 성공과 실패(Success/ Failure)


■ Ameangukiwa kikuti kibichi.
   녹색(신선한) 종려 잎이 그에게 떨어졌다.
■ Muonja asali, hutupa ugali.
   꿀을 맛 본 사람은 굳어버린 우갈리는 던져버리게 마련이다.



이 속담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아무런 노력 없이 우연히 찾아왔을 때에 쓰는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종려나무의 잎(palmleaf)은 상, 영예, 승리, 성공 등을 상징한다. 그래서 길을 지나다 우연히 종려 잎이 누군가에게로 떨어진다는 것은 그에게 우연한 행운이 찾아오는 것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속담으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종려 잎을 행운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우리 문화권에서는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대신에 호박을 사용하는데, 왜 굳이 호박을 사용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생김새가 둥글둥글하여 구르기 좋거나 옛날 사람들에게는 호박이 별식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이 속담은 온갖 어려움 끝에 성공한 사람이, 어려웠던 자신의 과거를 잊고 처음부터 잘난 듯이 뽐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속담의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속담이라도 상징물의 선택과 표현이 다른 것은 그 사회의 환경과 문화를 반영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풍부한 수자원과 좋은 환경적 조건을 바탕으로 논농사가 발달하였다. 그래서 생활 주변에서 쉽게 개구리를 볼 수가 있었고, 어릴 때의 모습(올챙이)과 다 자라서의 모습(개구리)이 현격히 다른 개구리를 보면서 그러한 속담을 착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논농사가 발달하지도 못했고, 기후적 영향으로 인하여 개구리를 많이 볼 수 없는 환경이 있다. 이들은 개구리 대신에 꿀과 포리지를 사용하였는데, 포리지는 이들이 아침 식사로 먹는 걸죽한 죽의 이름으로, 아침식사로 포리지를 먹는 것은 그것이 맛있고 영양가가 많아서라기 보다는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콤한 꿀을 맛본 사람은 이전에 먹던 하찮은 포리지는 더 이상 입맛에 맞지 않게 된다는 의미의 속담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포리지는 영국 등지에서 주로 아침식사로 대용되는 것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걸쳐 기업적으로 생산하여 보급시킨 것이라는 점은, 아프리카가 영국 식민지 하에서 받았던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6.48 절약과 낭비(Thrift /Waste)


■ Akiba haiozi.
   미리 준비해둔 것은 헛되지 않는다.
■ Akiba si mbi, ingawa ya kivumbi siku ya kivumbi hutia motoni.
   그것이 설혹 섬유모양의 코코넛 껍질일지라도 힘든 시기에 불을 밝히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것처럼, 준비해서 나쁜 것은 없다.
■ Hakuna akiba mbovu.
   해서 나쁜 준비는 없다.



이 속담들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아끼고 앞날에 대비하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 속담에 나오는 코코넛은 아프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자나무의 열매로, 보통은 배젖에서 야자유(椰子油)를 짜며, 이것을 말려 코프라(마가린·비누·양초 등의 원료)를 만드는 데에 이용되고, 그 껍질은 버려진다. 따라서 여기에서 코코넛 껍질은 불필요한 것, 쓸데없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쓸모 없어 보이는 코코넛 껍질조차도 먼지 폭풍이 이는 날에 불을 밝히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좋은 것, 좋은 목적을 위해 남겨두고 준비할 때 그것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위와 비슷한 속담으로 'Mali ya bakhili huliwa na wadudu.'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평소에 남는 물자가 생길 때에 이를 부주의하게 다루지 말고,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함을 충고하는 속담이다.

  비슷한 우리나라의 속담으로는 '돈은 상 귀에 뿔이 나기 전에 벌어야 한다.'가 있다. 여기에서 상 귀에 뿔이 난다는 말은 어린아이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상 근처에 모여든다는 것으로, 돈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벌어두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속담은 위에서 살펴본 아프리카의 속담과 뜻은 통하지만 두 문화권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아프리카에는 아직도 돈의 개념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준비해야할 대상으로서 다른 것들을 제치고 돈을 든 것에 차이가 있으며, 속담 속에 '상'이 등장한 것도 상 위에서 식사를 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식사문화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6.49 전쟁과 평화(War/ Peace)


■ Ndovu wawili wakisongana ziumiazo ni nyika.
   두 마리 코끼리가 서로 밀치며 싸울 때, 다치는 것은 풀이다.
■ Vita vya panzi [ni] furaha ya kunguru.
   메뚜기 사이의 전쟁은 까마귀를 기쁘게 한다.



이 속담은 두 큰 세력간의 싸움으로 그 사이에 낀 상관없는 약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오랫동안 식민지로서 식민지 지배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가지 이익을 착취당해왔다. 강대국들간에 전쟁이 나게 되면 피해를 입게 되지나 않을까 항상 떨어야 했다. 이처럼 강대국들 사이에서 고통받아야 했던 역사가 있다는 것은 아프리카와 우리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점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많은 침략을 당해왔고, 20C에 들어서는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의 4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속담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것에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가 있다. 이처럼 표현 방법이 다른 것으로부터 문화적 차이를 추정해보면, 아프리카는 사바나 기후로서 초지가 많고, 코끼리나 황소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환경에 있지만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바다 생물에 속하는 고래나 새우를 비유에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속담은 비슷한 힘을 가진 것끼리의 싸움이 그들 스스로의 파멸을 초래하거나, 그들이 약해짐으로써 양자의 공통의 적에게 이익을 주는 결과를 가져올 때 쓰인다. 이 속담은 두 사람이 싸워서 나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제 3자에게 이익을 줄뿐이므로 다투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좀 더 큰 규모에서는, black 아프리카 국가들끼리의 분쟁은 그들 국가의 지위와 이익을 약화시키고 백인 사회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아프리카의 환경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해마다 메뚜기와 전쟁을 치른다. 메뚜기 떼가 한번 몰려오면 그들이 왔다 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메뚜기 떼에 의한 피해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뚜기와 같은 친숙한 곤충(끔찍하게 친숙한...)이 속담의 소재로 선택된 것이다.  


6.50 여자와 남자(Women/Men)


■ Mke ni nguo.
   아내는 옷이다.
■ Mke ni nguo, mgomba kupalilia.
   아내는 옷에 달려있고 바나나 농사는 풀을 제거하는 것에 달려있다.
■ Chema chajiuza, kibaya chajitembeza.
   좋은 물건은 알아서 팔리지만, 나쁜 물건은 팔기 위해 광고해야 한다.
■ Sura nzuri haihitaji kupakwa rangi.
   잘 생긴 얼굴에는 화장할 필요 없다.



첫 속담은, 여자(확대되면 사람)의 미모는 꾸미기 나름이라는 뜻인 듯하다. 우리말에도 옷이 날개라는 표현이 있지 않은가. 두 번째 속담은, 아내는 잘 꾸며주고 바나나는 잡초를 뽑아주어야 하듯이, 사람/물건을 잘 돌봐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솔직히 이 속담이 여기 - 여자/남자 부분에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브랜드 - 이름 값의 중요성을 아프리카 인들도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6.51 노동과 게으름(Work/Laziness)


■ Achanikaye kwenye mpini hafi njaa.
   괭이로 (손에)물집 잡힌 사람은 굶어죽지 않는다.
■ Avunjaye nazi ni lazima ale tui yake.
   코코넛을 깬 사람은 반드시 속을 먹어야 한다
■ Anayejitahidi hufaidi.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 Anayetaka hachoki hata akichoka keshapata.
   무엇인가를 바라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다.
■ Awashaye ndiye ajikunaye.
   가려우면 스스로 긁는다.
■ Mtumaini cha ndugu hufa maskini.
   친척에게 의존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죽는다.
■ Aweza kugeuza yalala kuwa utajiri.
   쓰레기 더미를 재물로 바꿀 수 있다.
■ Kazi mbi si mchezo mwena.
   서툴게 일하는 것이 잘 노는 것보다 좋다.
■ Kazi ni kanzi.
   일은 보물이다.
■ Siku nyeusi, fedha nyeupe.
   힘든 일, 좋은 날.
■ Aingiaye mwituni, atareja na kuni.
   숲에 간 사람이 장작을 들고 돌아온다.
■ Mvivu hugaguna vifuvu.
   게으른 사람은 빈 코코넛을 씹는다.
■ Mtaka kilicho mbali hukitembelea.
   멀리 있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그곳으로 간다.
■ Alalamikaye kwa wingi hufanya machache.
   많이 불평하는 사람이 적게 일한다.
■ Fundi mbaya anateta na ala zake.
   서툰 장인이 도구 탓한다.
■ Mchagua jembe si mkulima.
   자기 괭이를 고르는 사람은 진짜 농부가 아니다.
■ Mshoni hachagui nguo.
   재단사는 천을 고르지 않는다.
■ Mlala mvulini, atakula nini?
   그늘에서 자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다는 의미)
■ Ajizi ni ufunguo wa umaskini.
   게으름은 가난의 열쇠이다. (게으르면 가난해진다.)
■ Ajizi nyumba ya njaa.
   망설임(혹은 게으름)은 굶주림의 집이다. (망설이거나 게으르면 굶주리게 된다.)
■ Uvivu hurithisha umaskini.
   게으름은 가난을 낳는다. (게으르면 가난해진다.)
■ Kwanza kazi, pili pato.
   먼저 일하고 돈 받아라.
■ Mtaka cha mvunguni huinama.
   침대 밑에 있는 것을 원하면 허리를 굽혀야 한다.
■ Mtu apandacho ndicho avunacho.
   사람이 어떤 것을 심으면 그것을 거둔다.
■ Alimao ndio avunao.
   경작하는 것(작물)이 수확하는 것(작물)이다.
■ Alimaye mtama havuni kunde.
   수수를 경작하는 사람은 콩을 수확하지 않는다.
■ Mpanda ovyo hula ovyo.
   불규칙적인 방법으로 심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불규칙적으로 먹게 된다.



이 속담들은, 노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굶어 죽지 않는 법이며,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노력은 힘들지 않은 법이다. 만약 피로를 느낀다면, 그때는 바라는 것을 이룬 후일 것이다. 자기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 없다. 잘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지, 남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쓰레기 더미를 재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란, 단순히 운이 좋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쓸모 없는 것을 재물로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속담들은,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도 있고 돌려서 말한 것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열심히 일해야 하는 법이다.

이제 열심히 일하면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일하지 않으면 아무 보상도 없다는 것 또한 보여준다. 일하지 않는 것을 허물로 여기는 사고 방식이 드러난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다. 무엇인가 아쉬우면,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게으른 사람에 대한 경계(?)는 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게으름보다는 부지런함을 더 중요시해왔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나듯이 부지런한 개미는 겨울에 먹을 양식이 있고 게으른 베짱이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게 된다. 이처럼 "게으름=가난함(굶주림)"이라는 등식이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아프리카 속담에서도 이러한 것이 보이는데, 대부분의 위에 나타난 속담에서 게으른 사람은 가난해지게 마련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게으름은 가난의 원인이다" 정도의 의미를 갖는 말을 "게으름은 가난의 집이다"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집"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원인"이라고 하는 의미를 대체할 수 있는 말로 "근원" 내지는 "뿌리"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들은 "뿌리"라고 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을 중시하는, 즉 조상을 중시하는, 그러한 전통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 "집"이 가지는 의미는―모든 일이 가정에서 시작되고 가족을 잃는 것은 마치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가족이나 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져있음과 연결시켜 생각한다면―우리나라에서의 "뿌리"가 가지는 의미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추측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집"이라는 말이 "원인, 근원"을 뜻하는 것도 이러한 아프리카인들의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게으름과 배고픔은 쌍둥이이다"라는 속담에서 상당히 참신하고 제대로 된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쌍둥이는 매우 닮았고 공통점이 많듯이, 그만큼 게으름과 배고픔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잘 표현해낸 것 같다. 이는 영어 속담에 있는 "게으른 놈과 거지는 사촌이다"라는 것과 매우 유사해서 흥미로웠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혹은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 그 결과가 생긴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 속담과 우리나라 속담을 비교해 보았을 때에 그 뉘앙스가 약간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속담의 경우에는 단순히 원인에 따라 그 결과가 있다는 의미에 그친 것 같다. 하지만 아프리카 속담은 그보다는 약간 농업(?) 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돌아오는 양식의 양이 결정된다는 의미가 더 강하게 드러나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속담에서 그러한 것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식량이 부족하여 먹을 것이 중요시되는 배경이 반영된 듯하다. 결론적으로 원인에 따라 결과가 생긴다는 의미에 부지런한 만큼 자신에게 양식이 더 많이 돌아온다는 어감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52 세상과 우주(World/Universe)


■ Ulimwengu hauna siri.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 Habari za nyumbani simfunulie jirani.
   가족 문제를 이웃에 알려주지 말라.
■ Macho hayana pazia.
   눈에는 칸막이가 없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다 볼 수 있다.)
■ Sikio halilali na njaa.
   귀는 배고픈 채로 자러 가지 않는다. 언제나 험담은 있게 마련이다.
■ Siri yako usimwambie mwanamke.
   여자에게 비밀을 말하지 말라.
■ Ukimficha jogoo kwenye pakacha kuna wakati atawika.
   만약 수탉을 바구니에 숨기면 언젠가는 수탉이 울 것이다.(사람들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 Watu siri huibana : [ndio hali ya duniani]
   사람들은 서로서로 비밀을 알아낸다 :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비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말을 조심하지 않게 되면 그 비밀은 드러나는 법이고, 보통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이 다 알게 된다. 이처럼 비밀을 간직하기란 쉽지 않은 것인데, 위의 속담들은 이를 표현하고 있다. 내부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이 바깥으로 절대로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공유하게 되면 그만큼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런데 그러한 속담 중에는 "세상에는 비밀이 존재할 수가 없다"라든지 "비밀이란 언젠가는 알려지게 되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속담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아프리카인들의 순수성을 유지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사실도 비밀이 될 수가 없다고 인식을 한다면 남에게 속이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순수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서구인들이 아프리카를 지배하기 이전까지는 주술사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백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위의 속담들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이와 유사한 것을 찾아보면,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또는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프리카의 속담들과는 달리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6. 결론

아프리카의 사회조직을 이해하는 핵심은 사회적 집단(social groupings)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개인은 매일 매일의 생활속에서 중복되어 집단에 소속된다고 볼 수 있는데 정리하여 본다면 첫 번째가 가족이나 동족, 씨족을 포함하는 친족집단이다. 두 번째는 비 친족 집단인 연령집단, 비의결사, 통과의례, 기술조합 같은 단체들이다. 셋째는 주거하는 지역에 따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인정치, 장로정치 구조(gerontocratic structure)는 유사이래로 인간의 계속성과 함께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유아, 아이, 배우자, 부모,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로 이동해 간다. 사회적으로는 통과의례나 연령등급, 그리고 비의결사같은 단계를 거쳐 옮겨가게 된다. 질병으로 일찍 죽지 않고 많은 아이들을 생산하고 길러낸 사람들은 연장자로서 사회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노인정치 사회에서는 연장자들의 회의에 상당한 권위가 있으나 그들의 통치는 서투르거나 압제적인 것이 아니다.

연장자들이 죽으면 그들은 명예스러운 조상들로서 후손들에게 기억된다. 또 후손들은 그들의 살아있는 집합적인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의 학자들은 아프리카의 조상숭배를 'ancestor worship'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worship'이라는 말은 아프리카인들과 조상들의 관계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조상숭배는 존경, 경외, 숭배등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조상숭배는 현실의 일시적인 순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서 사회조직은 마을의 사회적 영역뿐 아니라 전임자들의 사회적 시간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조상들은 초연장자(super-elders)다. 그들은 가장 최고의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축적된 모든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어떤 종류의 불사, 불멸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이 실존의 초점이 되고 있다. 결혼은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즉 죽은 사람, 현존하는 사람, 그리고 태어날 사람들 모두가 만나는 한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은 의무이고 협동적인 사회의 요청이며, 누구나가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는 삶의 리듬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공통체를 저주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반역자이고 범법자이며 비정상적인 일일 뿐 아니라 '인간이하'이다. 정상적인 여건 혹은 환경 안에 있으면서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이 사회를 거절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반대로 그를 거절해버릴 수 있다.

출산은 근원적인 불멸의 상실에 대항하여 벌이고 있는 인간의 투쟁을 위하여 개인이 생명의 씨앗을 봉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일종의 종교적인 의무로까지 생각되어질 수 있다. 생리적으로 볼 때에도 남편과 아내는 모두 그들의 자식속에서 재현된다고 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인간의 연쇄는 그러한 출산을 통하여 영구히 지속되어나가는 것이다. 후손이 없는 사람은 사실은 생명의 불을 꺼버리는 것이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된다. 결혼을 하지도 않고 아이도 가지지 않으면 그가 지니고 있던 육체적 지속의 줄이 단절되고 말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가장 불행한 남녀는 육체적인 죽음 뒤에 아무도 자기들을 '기억'해 줄자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과 출산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따라서 절대로 비난하거나 경멸해서는 안되는 신성한 이해이며 의무이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아프리카인들이 결혼에 관한 생각과 여러 관습들 예를 들면 신랑이 결혼하기 위하여 신부에게 많은 선물(신부값)을 주는 일, 일부다처제, 죽은 형제의 부인을 아내로 맞는 일,  부모가 자녀의 결혼을 결정하는 일등을 좀 더 분명하고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공동체가 친족 관계와 다른 사회적 구조가 뒤엉킨 협동적 특성을 지나고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도덕적인 악이든 자연적인 악이든 간에 개인이 당하는 악의 형태는 거의 모두가 마찬가지로 구성원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범하는 도덕적인 범죄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 전체에 대한 범죄이다.

인간 관계에서는 연령과 신분상의 위치에 따라 위계 개념이 강조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위계 개념은 신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사다리를 이루듯 형성되어 있다.

신은 창조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어버이이며,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호소와 청탁의 마지막 극점이 되고 있다. 그 신 밑에 여러 신적인 존재와 영이 있다. 이들은 인간보다 더 강한 자들이며, 여러 사회의 창시자나 선조이기도 하다. 그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사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년식, 결혼, 자녀의 양육 등을 통하여 완성된 완전한 인간이다. 인간들의 계층은 위로부터 왕, 통치자, 우사, 사제, 점술사, 주의, 각 가정의 가장, 연로한 어른, 부모, 손위형과 누나, 그리고 끝으로 공동체의 가장 어린 구성원으로 위계가 이루어진다.  

요루바족의 도덕적인 가치는 신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신을 "순수한 왕", "완전한 왕", 흰 옷을 입고 위에서 사는 분", "본질적으로 흰 대상, 양태가 없는(완전히 흰) 흰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요루바족의 원리의 본질은 품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바로 이 품성에 달려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드러운 품성은 생명의 줄을 사람의 손에서 끓어지지 않게 한다"라든가, "사람을 보호해주는 것은 좋은 성품이다"라고 말한다. 훌륭한 품성이란 결혼 전의 순결, 결혼 기간 동안의 신실성, 정중한 예절, 이기심과 반대되는 너그러움, 친절, 정의로움, 진실, 본질적인 덕으로서의 방정함, 도둑질하지 않는 일, 약속을 지키고 어리석음을 피하는 일,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지켜주고 특별히 여자를 보호하는 일, 노인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일, 위선적이지 않는 것 등이다.

"도덕적인 악"은 인간이 자기 동류인 인간에게 행한 것과 연결된 것이다. 이것은 모두 훌륭한 품성의 덕을 계발하고 드러내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들이다.

결국 도덕적인 "선"이나 "악"의 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회나 공동체 안에서 궁극적으로 개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관계의 본성이다. 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은밀한 죄"란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인간이거나간에 그가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에 의하여 그것, 혹은 그는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된다.

"자연적인 악"이란 인간의 삶에서 부닥치는 고통, 불행, 질병, 재난, 사고, 갖은 형태의 아픔 등에 대한 경험을 지칭한다. 이들 대부분의 현상은 자연적인 "원인"을 통하여 설명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사고"나 "우연"으로 인해서 어떤 슬픈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어떤 대리자(인간이나 영이나 간에)에 의하여서만 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러한 악을 "일으킨" 대행자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가 규범을 어겼기 때문에 신이나 영이 그 범법자를 처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 사람 자신이 사실상 자기 고통의 원인이다. 즉 그는 먼저 자기의 고통의 원인을 외면화했다가 다시 그 다음에 이를 내면화하는 것(안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여러 가지 형태의 고통은 거의 절대적으로 마법사, 사술사, 악한 주술을 행하는 사람 등, 인간인 행위자들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믿고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들은 사회적으로 악의 화신이다. 이런 부도덕한 행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스와힐리어에 대한 연구는 분명히 국내에서는 새로운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어과는 국내유일의 아프리카어과로서 1983년 스와힐리어과로 개설되어 그 동안 동아프리카 언어, 문화 그리고 지역학 연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왔으며 아프리카연구를 동부, 서부 그리고 남부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연구범위를 다변화시키고 확대하려는 계획에 따라 1989년 학과명칭을 아프리카어과로 변경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서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지금까지 해온 대로 주요 언어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더욱 강화할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한국 내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세계 각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스와힐리어』를 교양과정으로 개설하였다. 언어학과에서는 강의 내용이 명확히 드러내고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이해에 또 하나의 초점이 있음을 반영하기 위해서 교과목 명칭을 2002년 2학기에는 {아프리카의 언어와 문화}로, 2003년 1학기에는 {스와힐리어와 아프리카 문화}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스와힐리어는 BBC, 라디오 카이로(이집트), VOA(미국), 라디오 도이체벨레(독일), 라디오 모스코우 인터내셔널(러시아), 라디오 저팬 인터내셔널(일본), 라디오 차이나 인터내셔널(중국), 라디오 수단(수단), 라디오 사우스 아프리카 등 세계 라디오 방송국들에 있어서 특별히 다루는 주요한 언어중의 하나이다. 스와힐리어는 노래, 연극, 영화, TV프로그램 같은 예술세계에서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쓴 "라이베리아 소녀(Liberian girl)"라는 노래의 가사에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원해!)Nakupenda pia, nakutaka pia, mpenzi we!"라는 스와힐리 어구가 나온다. 잘 알려진 디즈니 영화인 "라이온 킹(Lion king)"에서도 스와힐리어 단어가 나온다. 예를 들면 배역들의 이름인 "사자(simba)" "친구(rafiki)"를 들 수 있다. 또한 스와힐리어구인 "문제없다(Hakuna matata)"도 이 영화에서 쓰이고 있다.

아프리카언어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제1언어인 스와힐리어가 중점적으로 학습되고 연구된다면 아프리카어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학의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문화와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스와힐리어에 대한 연구와 강의는 국내에서 더욱 심도 있고, 폭넓게 진행되어야 하며 나아가 한국어-스와힐리어 사전의 편찬도 서둘러야 할 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