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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냐(Maponya) 장례식에서의 경찰의 실수

리차드 마포냐 박사(Dr. Richard Maponya)는 아파르트헤이트 인종차별정책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남아공(이하 남아공으로 기술)의 기업인이었다. 그는 소웨토(Soweto) 흑인거주지역을 경제적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와 만델라의 사촌인 그의 아내는 소웨토에서 1950년대 초 Dube Hygienic Dairy라는 회사를 만들고 전기와 냉장고가 없는 소웨토에 자전거로 우유를 배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을 성장을 거듭하여 1970년대에는 일반 상점, 자동차 대리점, 주유소 등 소매업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는 정치에도 참여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마포냐는 도시반투위원회(Urban Bantu Council)의 일원이었다. 1960년대에 전국아프리카인 ..

남아공 국영전력회사 에스콤(Eskom)의 위기

국영전력회사 에스콤(Eskom)의 위기가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에스콤은 부실경영과 부정부패로 심각한 재정위기를 맞고 있으며 전력공급이 불안정하여 남아공 경제에 치명적인 위협을 주고 있다. 2019년 3월 기준으로 약 4,400억 랜드(약 31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있었으나 10월에는 남아공 GDP 8.5%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로 커지면서 남아공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10월 16일부터 17일까지 에스콤은 2월과 3월에 이어 7개월 만에 석탄화력발전소의 기술적 결함으로 인해 2,000MW 줄이는 순환 단전을 또다시 실시했다. 에스콤은 남아공 전력의 90% 이상을 공급하고 있으므로 전력공급문제는 경제와 직결되어 있다. 10월 22일에는 남아공 의회가 막대한 부채위기에 시달리..

시에라리온 내전

‘피의 다이아몬드’가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지속시킴 소년병, 사지절단, 강간 등 참혹한 내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의 ECOMOG가 201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Freetown)은 1787년 영국의 노예폐지론들에 의해 노예의 송환과 구출을 위한 장소로 마련된 곳이었다. 영국은 1808년 프리타운을 왕령식민지(Crown Colony)로 선포하고 포획된 노예선의 노예들을 정착시켰으며 1896년에는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식민 지배를 시작했다.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 철광석 등 지하자원이 풍부해 다른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가들과는 달리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국가였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라이베리아 내전

라이베리아에 역이주한 해방 노예들이 식민지배자처럼 원주민을 지배 ECOWAS의 개입을 통해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인이 해결하는 사례를 보여줌 내전 이후 평화적인 정권교체로 아프리카 민주화의 모범사례로 떠오름 노예무역으로 인해 아프리카인들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이 대규모로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강제적인 이주와 정착을 해야만 했다. 노예무역이 폐지된 이후 미국에서는 1817년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ACS)가 조직되어 해방된 노예를 아프리카에 재정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 결과 1821년 라이베리아를 만들고 수도는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에서 딴 먼로비아(Monrovia)라고 정했다. 이후 미국에서 풀려난 해방 노예와 미해군이 포획한 노예선의 노예..

차드 분쟁

차드 분쟁의 원인은 식민지배의 유산이며 전형적인 아프리카 분쟁 사례 국가통치권을 차지하기 위해 종교, 지역 갈등이 충돌 주변국가인 수단과 리비아의 영향이 계속해서 불안요소로 작용 아프리카 국가의 내전과 분쟁은 대부분 식민지배의 유산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차드는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차드의 정치적 불안정과 역사적 갈등을 제공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식민지배는 민족 집단과 지역간 차별의식을 심어주었고 통합된 국민의식을 갖지 못하게 분열시켰다. 내전이 발생한 이후 식민종주국인 프랑스와 이웃하고 있는 리비아와 수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차드 내전에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인 툼발바예(..

서사하라 분쟁

모로코의 역사의식은 이지역의 분쟁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 서사하라 문제는 모로코와 알제리의 갈등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상황 당사자의 합의와 타협보다는 유엔의 의지가 중요한 분수령 학자이건 일반인이건 필자가 만난 모로코인들은 ‘서사하라’를 이야기의 주제로 꺼내기만 하면 서사하라는 자신들의 영토라며 화를 내거나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서사하라 문제를 꺼내서 단 한 번도 부드럽게 이야기를 끝낸 기억이 없다. 왜 그들은 서사하라 문제만 나오면 그렇게 분개하는 것일까? 아프리카 국가들은 물론 유엔에서 서사하라를 55번째 아프리카 국가로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모로코인들은 서사하라에 집착하는 것일까? 무어제국을 건설했던 모로코는 이곳에 살고 있는 주요 종족인 사라위 족과 역사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