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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르의 무슬림과 기도시간

2018년 12월 28일 아침 6시 30분 알파자지(Mohamed Alfazazi)는 감기로 몸이 힘들 텐데도 꾸란을 암송하고 있다. 저렇게 열심히 알라를 찾는데 왜 이곳 사정은 어렵기만 한지.... 저런 열정으로 공부를, 일을 한다면 어떨까? 그는 작년에 사우디 메카를 다녀왔다고 하니 정말 신앙이 깊은 사람이다. 오후에 디파(Diffa)에서 젠다르(Zindar)로 이동하는 중에 길에 차를 세우더니 매트를 한 장들고 허허벌판으로 간다. 메카에 기도를 하는 시간이다. 알파자지가 앞에 서고 다른 사람들이 뒤에 서서 인도를 받는다. 공동체에서 신앙심이 깊거나 행실이 올바른 사람이 기도를 주관한다고 한다. 그래서 국회부의장도, 운전사도 경호원도 모두 알파자지 뒤에 서서 기도를 했었구나.

르완다 내전과 국가통합

벨기에가 만든 민족 정체성이 제노사이드의 원인 후투와 투치족 정치지도자들이 민족 정체성을 악용 1994년 이후 화해와 통합을 통한 국가발전을 도모 국민들은 카가메 대통령의 개발 ‘독재’를 환영 르완다는 ‘1000개의 언덕’이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또는 유인원인 마운틴 고릴라가 유일하게 살고 있는 곳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1994년 이후에는 ‘제노사이드와 폭력’의 땅으로 더 우리에게 알려졌다. 1994년 후투족과 투치족의 분쟁으로 약 3개월간 전체 인구 700만 명 중 80만 명이 살해되었고 약 200만 명이 이웃국가로 피난하는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다.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사건을 아프리카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필자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에서 르완다가 최초..

나이지리아 보코하람과 니제르델타 분쟁은 소외와 차별을 가져온 잘못된 정치의 결과이다

보코하람과 니제르델타는 나이지리아는 문제의 축소판! 소외와 차별, 가난을 지속시킨 잘못된 정치의 결과 가나 해역의 우리국민 납치는 나이지리아 무장단체의 소행 나이지리아는 북부의 이슬람인 하우사와 플라니족, 남부의 기독교도인 요르바족과 이보족으로 나누어져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이는 영국이 1914년 전혀 다른 두 지역을 하나로 합쳐 나이지리아를 만들고 프레더릭 루가드가 ‘간접통치’를 실시하여 분쟁의 씨앗을 남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 독립을 맞은 나이지리아는 비민주적인 정치로 인해 하나의 국가 및 국민 정체성을 만들지 못했고 4개의 주요 민족집단을 중심으로 지역·종족·종교 갈등이 끊임 없이 분출했다. 나이지리아는 지난 10년간 평균 경제성장률 6%대로 2015년 명목 GDP..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은 자원 차지 위한 지역분쟁이다

서구국 자원 약탈 욕심도 한 몫 “자원 있는 한 내전 종식 어려워” 정치적 안정ㆍ민주주의 정착이 관건 ‘왜 콩고민주공화국은 내전으로 고통을 받고, 저발전 상태에 머물고 있을까’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해 수단,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앙골라 등은 풍부한 자원을 가졌지만 오히려 ‘자원의 저주’를 받으며 오랫동안 내전을 겪어 왔다. 이들 국가에서 다이아몬드와 금, 주석, 콜탄, 목재 등 다양한 광물은 정부와 반군이 무기를 사는데 사용되거나 개인의 축재로 이용됐다. 르완다는 2013년 콜탄으로 알려진 탄탈륨 수출이 전세계 생산량의 28%를 차지, 2014년 단일국가로는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2015년 1월 폴 카가메 대통령이 르완다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콜탄을 훔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국제사회의 조사를 받을..

북아프리카 테러조직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5년부터 2016년 초까지 전 세계를 강타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프랑스와 벨기에서 발생한 테러일 것이다. 2015년 1월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테러에 이어 발생한 11월의 파리 테러(Paris’s Attack)와 2016년 3월의 브뤼셀 테러는 전 세계인을 경악케 하기에 충분했다. 전 세계인은 ‘이슬람 국가’(IS)의 테러로 규정짓고, 이후 유럽과 미국은 IS와의 전쟁을 기정사실화 했다. 이후에도 벌어진 아프리카의 말리 호텔 테러(2015.11)와 튀니지 경호 차량 테러(2015.11), 부르키나파소 호텔 테러(2016.01) 등까지 IS의 테러인 것처럼 보도되었지만 결국 말리나 부르키나파소 테러는 알카에다 계열의 알무라비툰(al-Murābiṭūn) 소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나이지리아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이다.

2015년 대통령에 당선된 무하마두 부하리(Buhari, Muhammadu ; 1942 -)는 특이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다. 1983년 12월부터 1985년 8월 사이에 나이지리아의 군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쿠데타를 일으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셰후 샤가리(Shehu Shagari)를 권좌에서 밀어내고 권력을 잡았다. 그 당시 부하리 장군은 최고 군사 위원회(Supreme Military Council)의 의장과 군 사령관직을 동시에 맡았다. 나이지리아의 심각한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와중에 1985년 군 총사령관인 이브라힘 바다노시 바방기다(Babangida, Ibrahim Badanosi ; 1941-)가 쿠데타를 주도하였고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여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015년 선거는 문민..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문화를 생산하는 국가다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축구에 아주 열광적이다. 나이지리아 출신 선수들이 유럽팀에서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축구는 나이지리아인들을 종족에 관계없이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슈퍼 이글스’라고 불리는 축구국가대표팀은 아프리카의 네이션스 컵에서 여러 번 우승과 준우승을 하였고 1994년부터는 월드컵에도 계속 진출하고 있다. 나이지리아 대표팀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축구 우승을 차지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조직력은 많이 떨어지지만 체력이 아주 좋아 앞으로 아프리카의 축구를 대표하는 나라가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화산업의 메카로 놀리우드(Nollywood)라고 불린다. 나이지리아의 놀리우드 영화산업은 미국의 헐리우드, 인도의 볼리우두(Bollywood)와 ..

나이지리아는 국가발전을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나이지리아는 장기간에 걸친 쿠데타와 정치적 불안정을 겪다가 1999년 요루바족 출신인 오바산조 대통령의 민선정부가 출범함으로써 정치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 부하리 대통령은 부패를 척결하고 국민화합을 통해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구조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다. 나이지리아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의 정착이며 지역·종족·종교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북부의 하우사-플라니, 서부의 요루바, 동부의 이보 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갈등을 조율하고 국가를 통합하는 것이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북부의 하우사-플라니족이 독립 이후 정치권력을 잡았지만 지만 남부의 요루바족과 이보족은 배제되었다. 1960년 독립이후부터 무슬림인 북부 지역의 하우사족이 군부를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