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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에이즈 확산막기 위해 콘돔 장려

가나에 있는 호텔들은 조만간 호텔 객실에 콘돔을 비치해야 한다는 정부 정책에 따라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부의 정책은 증가하고 있는 HIV/에이즈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이를 위해 가나의 관광부 장관 등은 호텔들이 이번 조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현재 가나는 남성의 6%, 여성의 2%만이 콘돔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궁극적으로 이번 조치는 에이즈로 인해 사망자가 증가하고 이에 대한 보건비용의 증가와 사회문제 등의 대두로 가나의 가난박멸 정책에 많은 장애가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먼저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먼저 콘돔을 어디에서나 살 수 있게 충분히 시장에 공급하는 것이다. 또한 여성들이 콘돔을 기피하는 이유가 콘돔가격이 너무나 비..

[스와질랜드]국가비상사태 선언

스와질랜드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식적으로 인도적인 도움을 전세계에 요청하였다. 스와질랜드 수상 템바 드라미니는 18일 기자회견을 갖고 “스와질랜드는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며 스와질랜드가 직면하고 있는 이 도전을 극복할 수 있게 어떠한 재원이라고 사용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스와질랜드는 가뭄과 가난 그리고 에이즈의 만연으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고 있는 실정이다. “에이즈와 가난의 끔찍한 결합은 가족을 해체시기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스와질랜드 왕국은 국제사회의 긴급한 개입을 요청하는 절망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다”라고 수상을 덧붙였다. 국가재난 구호 상황팀은 한달 전에 이미 정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고 요청했었다. 상황팀장 빈 은시반제 박사는 “많은 국제 구호..

아프리카 도시들 - 최악의 평가

최근 Economist Intelligence Unit(EIU)의 조사에 의하면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가 세계에서 거주하기에 가장 최악의 도시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로써 짐바브웨의 최근 몇 년간 정치, 경제의 불안으로 인한 사회불안 그리고 만연하고 있는 범죄와 가난 등이 짐바브웨의 이미지를 얼마나 악화시켰는지를 증명하게 되었다. 이번에 실시된 설문조사는 2월 초에 작성된 것으로 전세계 주요 명망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하였으며 짐바브웨 하라레의 경우 짐바브웨의 정치, 경제의 현황이 현재에도 계속 불안정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생활수준이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세계 130개 도시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하라레는 지난 번 조사보다 8계단이 떨어진 113위를 기..

[말리] 여성할례 없애자

아프리카 말리정부는 관습에 의해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는 여성 할례에 대해 금지를 고려중에 있다. 서부아프리카의 가난한 국가인 말리에서는 여성 열명 중 아홉명이 성년의식의 일환으로 여성의 음핵을 일부 또는 전체를 절제하는 시술이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여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말리의 인구 약 1천2백만명 중 이 관습에 적용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리정부는 비록 이 관습이 여성들의 보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관습을 금지시키는 법을 아직 마련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유니세프(UNISEF)와 할례에 반대하는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는 National Programme은 종교, 시민사회 지도자들과 최근 수도 바마코에서 회담을 가져 이 관습과 싸울 새로운 전략들을 마련하기로 하는 ..

13. 헤미드 음넴와 3

나는 나의 교사직을 1978년부터 키고마에서 시작했다. 키고마는 아주 멀어서 기차를 타면 2박3일이 걸린다. 키고마에서는 잘 지냈는데 나는 아직 젊었고 그 지역은 여기보다 모든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키고마 지역에는 와하 부족이 산다. 그들은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게 잘 대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거기서는 키와 말을 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가르쳤는데 그 애들은 아직 스와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나는 산수와 스와힐리와 지리를 가르쳤다. 내가 거기있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다레살람에 왔더니 아버지는 무힘빌리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얼마 후 돌아갔다. 지금 내가 있는 학교는 굉장히 크다. 학생수가 2천 5백명이다. 교사의 수는 54명인데 7명만 남자선생이고 나머지..

12. 헤매드 음넴와 2

나는 1979년스물세살 때 결혼을 했다. 부모가 나의 아내를 골라주었다. 그녀는 킬와 출신이다. 해안 지역에서는 아버지가 상대자를 골라주는 것이 관습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가 골라주지 않는다. 그러나 결혼 4년째 되던 해 이혼을 했다. 아침 열시 딸이 아파서 보러 학교에서 집으로 갔는데 아내가 집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학교에 가는데 가는 길에 아내가 다른 남자랑 같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랬더니 그들이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타라카(이혼을 공표하는 서류)를 썼다. 아내는 나의 월급이 너무 적어서 다른 남자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 타라카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몸을 팔든지 맘대로 하라고 했다. 그 후 소식을 듣고 장인이 왔는데 이야기를 듣더니 더 이상 함..

11. 나는 집을 짓고 싶다. 그러나 저축을 할 수가 없다 - 헤매드 음넴와 1

헤매드 음넴와 (남, 44세) " 나는 집을 짓고 싶다. 그러나 저축을 할 수가 없다. 딸의 교육을 위해서 돈을 모으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헤매드 음넴와이고 44년전에 태어났다.(1956년생) 나의 직업은 교사로무와냐 말라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나의 부모는 원래 해안지역의 루피지 출신인데 1952년 다레살람으로 이주했다. 루피지는 농촌이어서 농사를 지어야 하나 아버지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서 다레살람으로 온 것이다. 다레살람에 와서 아버지는 탄자니아 부두용역 회사에 취직을 하여 1956년부터 1981년 까지 일했다. 아버지의 월급은 아주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퇴직한 이듬해에 작고했는데 60세 였다. 척추결핵으로 원인이라고 사망 진단서에 씌여 있었다. 루피지에는 물론 지금도 친척..

10. 아샤 살롬 압달라 2

아이들은 두 번째 남편에게서 지금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큰아들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는 죽었다. 세 번째 남편에게서는 아이를 넷 낳았다. 큰아들은 1962년 막내아이는 1983년 생으로 지금 열여덟이다. 딸은 호텔에서 일하고 알리도 호텔에서 일하고 하나는 택시운전사이고 하나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딸 하나는 결혼해서 집에 있고 다른 딸 하나는 나와 같이 일하고 있고 셋은 오만에 있다. 그애들은 일자리를 찾아 거기에 간 것이다. 딸 하나는 중학교 1학년까지만 마쳤다. 그리고는 결혼해버렸다. 정말 실망스럽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이들을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여기 지금 나를 돕고 있는 애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시험에는 떨어졌다. 그래서 막내아들만큼은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싶..

9.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 - 아샤 샬롬 압달라 1

아샤 살롬 압달라 (여, 58세)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 나는 내 사업에서 돈을 벌어 사업을 늘리고 쿠션카바를 외국에 수출하고 싶고 내가 고용한 모든 사람들에게 월급을 지불하고 싶다.’ 나의 이름은 아샤 살룸 압달라이다. 나는 1943년 9월 5일에 태어났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오만에서 왔는데 잔지바르 여인과 결혼해서 그곳에 자리잡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잔지바르에 낳아서 흑인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그 아들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마수드 비날리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랍여인(나의 어머니)과 결혼해서 아이를 여덟을 낳았다. 아버지는 돌아가고 어머니는 지금도 살아있는데 나이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는 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샴바와 집이 있다. 그 ..

23. 술과 음료 이야기 2

2. 음료 1)차 탄자니아 사람들은 아침이면 으레 물을 끓여 차를 마신다.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으로 빈 속을 채울 수 있고 특히 고지대나 해안지방에서도 서늘한 계절, 아침에 차를 마셔서 추위를 달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직장에서는 고용원이 아침마다 차를 끓여 보온병에 넣어 놓는 것이 일과이다. 티 브레이크가 있어서 10시쯤이면 전 직원이 차나 커피를 마신다. 그러나 이렇게 차를 마시는 습관이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것은 아니다. 탄자니아에 차가 들어온 것이 1920년대로 독일의 정착민들이 ‘우삼바라’라고 하는 기후가 좋은 곳에 차 농원을 만들면서부터였다. 그 후 차 생산은 점차 늘어나 차는 탄자니아의 주요 수출품목이다. 차의 국내 소비량은 설탕이 귀할 때는 저조했으나 설탕을 손쉽게 구하면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