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테마 기행 285

15. 오스타 킬로사 2

나는 초등학교 8학년을 마쳤다. 키사 미션스쿨이었다. 학교까지 12킬로 정도 되었다. 아침 일찍 5시경 일어나서 가야했다. 매우 멀어서 항상 뛰어가야 했다. 그때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다니고 시험에 통과하면 5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학비는 거의 무료였고 학교에서 급식을 했다. 8학년을 마치고는 나는 이링가에 있는 교사양성학교(teacher's training college)에 갔다. 역시 미션스쿨이다. 학교 기숙사에서 다녔다.그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겁이 나서 가기가 싫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65년에 코스를 마치고 66년부터 교사가 되어 일을 했다. 18세 때부터 교사가 된것이다. 도도마의 음파우파우 초등학교로 가게되었다. 도도마는 이링가보다도 ..

14.‘아이들에게 먹이고 학교 보낼 돈이 있을 때 아무와도 다툼없이 잘 지낼때 나는 즐겁다.’ - 오스타 킬로사 1 (여, 53세)

‘아이들에게 먹이고 학교 보낼 돈이 있을 때 아무와도 다툼없이 잘 지낼때 나는 즐겁다. 아이들이 시험에 통과하면 더 기쁘다.’ 내 이름은 오스타이고 아버지는 아브라함 킬라사이다. 나는 음베야 지역에서 왔다. 냐큐사가 나의 부족이다. 1948년 생이다. 나는 소코이네 국민학교 교사이다. 나의 아버지는 1976년에 돌아갔다. 아마 70세 정도였을 것이다. 아주 나이가 많았다. 나의 어머니는 이름이 레지나이고 ( 나의 딸 이름이 레지나이다. 어머니를기억하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다. 나의 아버지는 chief 였다. 큰 치프와 작은 취프가 있는데 나의 아버지는 작은 취프였다. 그래서 돌보는 지역이 작다. 타누 시절에는 그는 지역의 책임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수많은 커피 밭이 있었다. 나큐사는 소나 다른 짐승은 기..

13. 헤미드 음넴와 3

나는 나의 교사직을 1978년부터 키고마에서 시작했다. 키고마는 아주 멀어서 기차를 타면 2박3일이 걸린다. 키고마에서는 잘 지냈는데 나는 아직 젊었고 그 지역은 여기보다 모든 물가가 쌌기 때문이다. 키고마 지역에는 와하 부족이 산다. 그들은 타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게 잘 대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거기서는 키와 말을 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가르쳤는데 그 애들은 아직 스와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나는 산수와 스와힐리와 지리를 가르쳤다. 내가 거기있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다레살람에 왔더니 아버지는 무힘빌리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얼마 후 돌아갔다. 지금 내가 있는 학교는 굉장히 크다. 학생수가 2천 5백명이다. 교사의 수는 54명인데 7명만 남자선생이고 나머지..

12. 헤매드 음넴와 2

나는 1979년스물세살 때 결혼을 했다. 부모가 나의 아내를 골라주었다. 그녀는 킬와 출신이다. 해안 지역에서는 아버지가 상대자를 골라주는 것이 관습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가 골라주지 않는다. 그러나 결혼 4년째 되던 해 이혼을 했다. 아침 열시 딸이 아파서 보러 학교에서 집으로 갔는데 아내가 집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학교에 가는데 가는 길에 아내가 다른 남자랑 같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랬더니 그들이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타라카(이혼을 공표하는 서류)를 썼다. 아내는 나의 월급이 너무 적어서 다른 남자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 타라카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몸을 팔든지 맘대로 하라고 했다. 그 후 소식을 듣고 장인이 왔는데 이야기를 듣더니 더 이상 함..

11. 나는 집을 짓고 싶다. 그러나 저축을 할 수가 없다 - 헤매드 음넴와 1

헤매드 음넴와 (남, 44세) " 나는 집을 짓고 싶다. 그러나 저축을 할 수가 없다. 딸의 교육을 위해서 돈을 모으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헤매드 음넴와이고 44년전에 태어났다.(1956년생) 나의 직업은 교사로무와냐 말라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나의 부모는 원래 해안지역의 루피지 출신인데 1952년 다레살람으로 이주했다. 루피지는 농촌이어서 농사를 지어야 하나 아버지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아서 다레살람으로 온 것이다. 다레살람에 와서 아버지는 탄자니아 부두용역 회사에 취직을 하여 1956년부터 1981년 까지 일했다. 아버지의 월급은 아주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퇴직한 이듬해에 작고했는데 60세 였다. 척추결핵으로 원인이라고 사망 진단서에 씌여 있었다. 루피지에는 물론 지금도 친척..

10. 아샤 살롬 압달라 2

아이들은 두 번째 남편에게서 지금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큰아들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는 죽었다. 세 번째 남편에게서는 아이를 넷 낳았다. 큰아들은 1962년 막내아이는 1983년 생으로 지금 열여덟이다. 딸은 호텔에서 일하고 알리도 호텔에서 일하고 하나는 택시운전사이고 하나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딸 하나는 결혼해서 집에 있고 다른 딸 하나는 나와 같이 일하고 있고 셋은 오만에 있다. 그애들은 일자리를 찾아 거기에 간 것이다. 딸 하나는 중학교 1학년까지만 마쳤다. 그리고는 결혼해버렸다. 정말 실망스럽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이들을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여기 지금 나를 돕고 있는 애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시험에는 떨어졌다. 그래서 막내아들만큼은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싶..

9.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 - 아샤 샬롬 압달라 1

아샤 살롬 압달라 (여, 58세)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 나는 내 사업에서 돈을 벌어 사업을 늘리고 쿠션카바를 외국에 수출하고 싶고 내가 고용한 모든 사람들에게 월급을 지불하고 싶다.’ 나의 이름은 아샤 살룸 압달라이다. 나는 1943년 9월 5일에 태어났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오만에서 왔는데 잔지바르 여인과 결혼해서 그곳에 자리잡았다. 나의 할아버지는 잔지바르에 낳아서 흑인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그 아들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마수드 비날리이다. 나의 아버지는 아랍여인(나의 어머니)과 결혼해서 아이를 여덟을 낳았다. 아버지는 돌아가고 어머니는 지금도 살아있는데 나이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는 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샴바와 집이 있다. 그 ..

23. 술과 음료 이야기 2

2. 음료 1)차 탄자니아 사람들은 아침이면 으레 물을 끓여 차를 마신다.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으로 빈 속을 채울 수 있고 특히 고지대나 해안지방에서도 서늘한 계절, 아침에 차를 마셔서 추위를 달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직장에서는 고용원이 아침마다 차를 끓여 보온병에 넣어 놓는 것이 일과이다. 티 브레이크가 있어서 10시쯤이면 전 직원이 차나 커피를 마신다. 그러나 이렇게 차를 마시는 습관이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것은 아니다. 탄자니아에 차가 들어온 것이 1920년대로 독일의 정착민들이 ‘우삼바라’라고 하는 기후가 좋은 곳에 차 농원을 만들면서부터였다. 그 후 차 생산은 점차 늘어나 차는 탄자니아의 주요 수출품목이다. 차의 국내 소비량은 설탕이 귀할 때는 저조했으나 설탕을 손쉽게 구하면서부..

22. 병맥주를 마시면 감옥행? - 술과 음료 이야기 1

1. 술 탄자니아가 탕가니카로 불리기 시작하던 19세기 말 식민지 시절, 백인들은 흑인들이 술 마시는 것을 금지했다. 흑인들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여겨 행여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릴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술 마시고 식민정부에 대항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깔려있었다. 따라서 아프리카인은 병에든 포도주나 위스키, 맥주 등을 살 수 없었다. 1934년까지는 시중에 병맥주가 아예 없었고 만일 흑인이 병에 든 술을 마시면 6개월 형에 처해졌다. 특히 병에 든 술을 금지한 것은 백인들에게 술이란 유럽에서 들여온 병에 담긴 술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의 전통 술은 비공식적인 어떤 것이었다. 사실 예전 아프리카에서 술은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의식이나 행사에 반드시 술이 있어..

8. 키하울리 4

제 어머니 즉 아내와 나는 97년에 결혼 50주년되는 금혼식을 했었다. 이제 결혼한지 52년이 된다. 나의 아내는 이제 좀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하다. 우리 소유의 집을 지니고 산다. 집은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 내가 직접 조금씩 조금씩 지었다. 은행융자는 한꺼번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내주고 짓는 현장을 검사하고 또 내주고 하는 식이었다. 집을 다 짓고 나면 즉시 내 월급에서 융자를 강제로 갚아나가게 되어있다. 다 갚아야 집의 명의가 내 앞으로 이전되었다. 같은 대지에 집을 두 채 지었는데 큰집은 방이 세 개짜리로 세를 주고 나는 방이 두 개인 작은 집에 살고 있다. 뭐 우리가 잘사는 것은 아니다. 집세에 의지해서 사니까 어떨 때는 세든 사람이 돈이 없다고 집세를 못 낸다고 하면 기다려야 한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