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아프리카의 내전과 분쟁 38

르완다 내전 - 콩고민주공화국 내전(3)

☞ 제2차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의 전개 카빌라 정권은 모부투정권과의 내전과정에서 후투족 난민들을 대량학살 하였다는 의혹을 받게 되었다. 또한 카빌라 정권내에는 르완다 투치족 출신의 카바리(Kabari)가 국방장관을 지내는 등 르완다 투치족 계열의 군인들이 군사고문으로 머물고 있어, 카빌라정권이 르완다 투치족의 괴뢰정권이라는 비난도 받게 되었다. 또한 정당활동을 전면적으로 금지시키면서 군부독재에 대한 경계심을 유발시켰다.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카빌라는 국방장관을 교체하고, 군사고문들을 추방하는 하는 한편, 정부내에서 투치계들을 제거하면서, 우간다, 르완다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였다. 1998년 7월 카빌라가 르완다 투치족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며, 동시에 자신의 집권을 도운 투치계의 바냐물렝게..

르완다 내전 - 콩고민주공화국 내전(2)

☞ 르완다 내전과 제1차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모부투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1당 독재정권을 유지하였으나, 1990년 미국이 군사 및 경제지원을 중지하자, 권력기반이 점차 약화되어 다당제를 허용하는 독재정권의 기반이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1994년 이웃한 르완다에서 내전이 발생하여 후투족이 동부지역에 대거 유입되어 르완다에 대한 반정부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모부투는 르완다의 후투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 콩고 민주공화국은 1995년 키부(Kivu) 남부지역에 거주하던 투치계 바냐물렝게(Banayamulenge)족의 시민권을 부정하고, 콩고를 강제로 떠나도록 명령하였다. 바냐물렝게족은 18세기부터 키부 남부지역에 거주해 왔으나, 1910년 서방세력이 자의적으로 콩고-르완다 ..

르완다 내전 - 콩고민주공화국 내전(1)

콩고지역에는 콩고왕국이 있었으나, 19세기말 서방 제국주의 세력의 침입에 의해 콩고강을 중심으로 분리되어 대서양을 끼고 있는 서부지역은 프랑스가, 내륙의 탕가니카호(湖)를 끼고 있는 동부지역은 영국이 각각 점령하였다. 1885년 콩고조약에 의해 동쪽은 벨기에령이 되고, 서쪽은 프랑스령이 되어 1960년 독립을 성취할 때까지 각각 식민통치를 당하였다. 1960년 서부지역은 콩고 공화국(首都의 명칭에 따라 브라자빌 콩고라고 부르기도 한다)으로 동부지역은 콩고 민주공화국(킨샤샤 콩고, 1971년부터 1997년까지는 자이레 공화국으로 불리웠다.)으로 각각 독립하여, 냉전기에는 콩고공화국이 구소련권에, 콩고민주공화국이 미국권에 편입되어 있었다. 벨기에령 콩고지역은 독립운동 때부터 카사부부(Joseph Kasavu..

르완다 내전 - 부룬디

르완다의 경우와 유사함. 희생자의 숫자와 학살진행속도가 다를 뿐임. 1962년 독립이후에도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후투족이 집권. 1965년 투치족의 구데타와 후투족 학살이 진행됨. 1993년 사상 최초로 후투족 민선 대통령 은다다예(Melchior Ndafaye)가 집권. 1994년 4월 은터리야미라(Cyprien Ntaryamira)가 르완다 대통령과 함께 암살당함. 1994년 7월 12개 정당이 참여하여 양 부족간의 권력분점(power sharing)에 합의하고 9월 실시된 선거에서 다시 후투족 출신의 은티반퉁가야(Sylvestre Ntibantungaya) 대통령이 당선됨. 1996년 투치족은 부요야(Pierre Buyoya)가 구테타로 집권함. 주변국들은 부요야 정권에 대하여 경제봉쇄조치를 취함...

르완다 내전 - 르완다의 대외정책

- 비동맹중립주의, 경제개발을위하여친서방정책추구 - 내륙국으로교통로확보및안보를위하여주변인접 4개국(탄자니아, 우간다, 자이르, 부룬디)과의선린우호정책을추구함. ☞ 우간다와의관계 - 우간다무세비니정권과군사정치적긴밀관계유지 - 르완다는수입을동부아프리카권에의존하는데, 이중 80%는우간다를통한수입임. - '86.4 우간다친정부출범후르완다.우간다양국공동위개최및일반협력협정을체결, 안보, 통상, 운송분야협력강화 ☞ 부룬디와의관계 - 1975. 5 르완다, 부룬디, 자이르 3국외무장관들은 부카부(Bukavu)에서회합, 대호수국경제공동체(Cepgl)구상, Kigali에상설위원회설치 - 1976년 3국은대호수국경제공동체(Cepgl)를창설함. - 94.7.9 르완다 Paul Kagame가 Kigali 입성이후르완다..

르완다 내전 - 서구 선진국의 입장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콩고민주공화국의 동부지역, 그리고 탄자니아 5개국을 포함하는 대호수 지역은 나일-사하라 어족과 반투족이 대립하는 종족분규의 장인 동시에 불어권 아프리카와 영어권 아프리카의 경계지역이기도 하다. 언어문화적으로는 불어권에 속하면서 정치 경제적으로는 영어권에 속한다. 즉 양대문화권의 각축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르완다 사태해결을위해 95.11월카이로정상회의, 96.3 튜니지정상회의, 96.6 아루샤정상회의, 96.7월야운데 OUA정상회의가개최되었으나미국은소말리아경험으로개입을기피하고 UN,OUA는국제군 2.500명을파견코자했으나효과가없었음. 아루샤 평화협정이후 약 2500명의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효과적으로 대량학살을 막지 못함. 미국은 자신의 국익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르완다 내전- 내전일지

1890-1916년 독일령 동아프리카, 1916-1962 벨기에령. 1959년 르완다의 왕 무와미 무타레(Mwami Mutare) III가 사망하고 정권을 잡은 투치족 정부는 후투족 지도자들을 살해하면서 후투족의 반란으로 이어져 약 15만 사상자 발생. 약 8만명의 투치족들이 우룬디와 주변국가로 피난. 마지막 왕인 투치족의 키게리 1세도 망명. 1960년 선거로 후투족이 정권장악. 1962년 7월 1일 독립. 초대 대통령으로 카이반다(Gregorire Kayibanda) 선출. 1965년 1969년 재선됨. 1963년 부터 강제추방된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공격함. 보복조치로 수천명의 투치족이 살해당하고 약 1만명의 투치족이 우간다와 부룬디로 추방당함. 1973년 하뱌리마나(Juvenal Haby..

르완다 내전-후투족과 투치족

대호수지역에 있는 조그만 소국. 인구 약 750만, 면적 2만 6000km, 인구밀도 274/km 공용어 키냐르완다어, 프랑스어, 스와힐리어를 사용한다. 과거에는 루안다-우룬디(Ruanda-Urundi)로 벨기에가 통치 : 현재의 루안다와 부룬디. 원래의 선주민은 피그미족(Twa). 대다수 부족은 후투족(85%). 투치족(약 14%). 후투족과 투치족은 서로 다른 부족으로 역사적 배경이 다를 뿐만 아니라 외모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름. 후투족은 다수족으로 반투족에 속하며 피지배민족으로 주로 농경에 종사하였었고 투치족은 나일 사하라 어족으로 큰 뿔소를 기르던 유목민족으로 호전적이었으며 14세기에 북방으로부터 이주하였으며 지배종족으로 주로 사업이나 정부기관에서 일한다. 벨기에 식민정부는 소수부족인 투치족을 우..